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외곽에 있는 윌레미스테 지역. 대형 쇼핑몰과 공원이 몰려있는 루트사 거리를 지나다 보면 파란색 외관에 ‘enter e-Estonia(e-에스토니아로 들어오세요)’라고 크게 써 있는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바로 에스토니아의 전자정부 시스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e-에스토니아 쇼룸’이다. 2009년 문을 연 이후 130여개국에서 4만9,000여명이 방문한 명소다.
2일(현지시간) 이곳에서 만난 애나 피페랄 에스토니아 쇼룸 매니징디렉터가 자신의 전자신분증(e-ID)을 컴퓨터에 꽂고 정부 홈페이지에 접속해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그의 주소부터 부동산 관련 내역, 차량 번호, 의료기록, 건강보험 기록 등이 속속 나타났다. 심지어 반려동물 정보까지 있었다.
이어 토지위원회(Maa-Amet) 홈페이지에 접속해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검색했더니 그가 소유한 에스토니아 남쪽 아바 팔루자 지방 땅의 위성 지도와 등록일, 구매 목적, 기타 소유지 등 각종 정보가 떠올랐다. 기업등록 홈페이지에서는 에스토니아 최대 기업인 탈린크 그룹의 지배구조, 부채상황, 연간 재무재표와 함께 이사회 임원ㆍ감사 명단, 그들과 다른 기업의 연관성 등이 줄줄이 표시됐다.
피페랄 디렉터는 “전자정부 시스템에는 개인정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정보가 공개돼 있어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며 “특히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한) 엑스로드(X-Road) 기반의 전자정부 서비스 덕분에 사람이 손수 했다면 800년 걸릴 일을 1년 만에 처리할 만큼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전자신분증으로 정부 서비스 99% 이용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스토니아는 전자정부 시스템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국가다. 에스토니아 인구는 서울의 7분의 1 수준인 130만명, 국토 면적은 한국의 절반 크기에 불과한 4만5339㎢인데 그나마 절반은 숲이다. 1991년 구소련에서 독립했을 땐 성장률 -14%를 기록할 만큼 변변한 경제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고 마땅한 천연자원도 없는 나라였다. 이런 에스토니아가 ‘발트해의 호랑이’로 거듭날 수 있던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추진한 전자정부 덕이다. 이를 통해 독립 당시 2,000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2만달러에 육박하는 등 북유럽 강소국으로 급부상했다.
전자정부의 중심엔 전자신분증을 이용한 ‘디지털 서명’이 있다. 에스토니아 국민은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칩이 내장된 전자신분증을 발급 받는데, 신분증 카드를 컴퓨터에 꽂고 본인 인증만 하면 온라인상에서 납세, 투표, 교육 등 모든 행정서비스를 한번에 이용할 수 있다.
디지털 서명을 통해 약 2,600가지, 전체 정부서비스의 99%를 온라인에서 이용할 수 있다. 연말정산처럼 복잡한 절차도 3분이면 끝난다. 대기업에서조차 수십 명의 회계사를 불러 복잡한 서류를 검토하는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창업 신고는 서류 구비나 담당기관 방문 없이 온라인에서 바로 할 수 있고 30분이면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연금이나 정부 보조금도 디지털 서명을 통해 클릭 몇 번으로 받을 수 있다.
병원 처방전 발급 등도 디지털 서명으로 이뤄진다. 약국에서 별도의 처방전을 제출할 필요 없이 전자신분증만 보여주면 된다는 의미다. 다니던 병원을 옮겨도 모든 병력과 치료 과정이 새로운 의사에게 공유돼 불필요한 검진을 다시 받을 확률이 낮아진다. 전자신분증을 내밀었을 때 안 되는 일은 오직 결혼과 이혼, 부동산 거래, 이렇게 3가지뿐이다. 디지털 서명을 통해 매년 GDP의 2%에 해당하는 행정비용을 절감하고 있다는 게 에스토니아 정부의 설명이다.
전자정부에 블록체인을 더하다
이처럼 탄탄한 전자정부 시스템을 가진 에스토니아가 블록체인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7년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사이버공격을 받으면서부터다. 개인정보 등 보안에 대한 경각심이 전보다 더욱 높아지면서 에스토니아는 이듬해부터 토종 보안기업 가드타임(Guardtime)과 함께 정부 기록에 블록체인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는 의료정보 관리 시스템, 상속등록, 공공문서, 사업자 등록 등 다양한 정부 업무를 관리하는 국가정보 교환 플랫폼 엑스로드(X-raod)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했다. 전자정부 시스템에 블록체인까지 도입함으로써 정보가 조작되거나 해킹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더한 것이다.
어떤 회사가 얼마를 벌어들이는지, 특정 기업인의 재산이 얼마이고 어디에 땅을 소유하고 있는지 등을 몇 번의 클릭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개인정보의 투명성을 높이는 과정에서도 블록체인의 영향은 컸다.
피페랄 디렉터는 “개인정보가 공개돼 있지만 (블록체인 시스템 덕에)조회 기록 또한 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정보를 누가 언제 검색해봤는지,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며 “예컨대 주치의 아닌 의사가 내 의료정보를 들여다본 사실이 확인되면 정부에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안에선 흔적이 남기 때문에 사후 조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 몇 년 전 에스토니아 전직 총리의 건강기록을 조회했던 의사가 당사자 항의로 의사 면허를 박탈 당했다.
에스토니아 국민의 모든 정보가 블록체인에 올라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해시값(디지털 지문 역할을 하는 자료의 원본 고유 코드)만 올리는 방식으로 효율성을 극대화 했다. 3일(현지시간) 탈린 정부청사에서 만난 심 시커트 정부 최고정보책임자(CIO)는 “정보의 무결성(의도적으로 변경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는 특성)을 위해 전자정부 시스템에 블록체인을 도입했다”며 “데이터베이스는 중앙화된 시스템에 있고, 해시값만 블록체인에 올려 정보가 위ㆍ변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에스토니아 정부가 기술을 선택하는 기준은 신뢰성과 비용의 효율성”이라고 덧붙였다.
전자영주권 발급, 13만원이면 가능
에스토니아 정부가 발행하는 전자영주권(e-레지던시)도 전자정부와 블록체인이 만난 혁신의 산물이다. 에스토니아는 2014년 세계 최초로 블록체인 기반의 적용한 전자영주권, ‘e-레지던시’ 서비스를 시작했다. 온라인을 통해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을 신청하고 100유로(13만원)를 낸 뒤 현지 정부의 승인을 받으면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에스토니아에서 창업할 수 있다. 사이버상에서 가상의 영주권을 받아 국적과 국경에 관계없이 사업에 나설 수 있는 셈이다. 특히 에스토니아는 유럽연합(EU)에 가입돼 있어 이를 발급 받으면 EU에서도 사업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도입 4년 만에 전 세계 154개국에서 4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자영주권을 발급 받았고, 한국에서도 1,124명이 이를 취득했다. 이들이 창업한 회사만도 6,000개에 달한다. 만일 회사 이익을 에스토니아에 재투자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전자영주권 발급자들이 2021년까지 2만개 기업을 설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커트 CIO는 “어디서 거주하든지 에스토니아에서 사업을 할 수 있고 유럽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국내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허경주 기자
출처 : 한국일보
소식 감사합니다,^^